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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편 - 慈溪亭(자계정) -

 

소재지 :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건립연대 : 1730년() 건립
건립자 또는 연고자 : 慈溪 曺龍翰(1694-1741)
건물의 입지 : 江海沿邊形
건물의 형태 : 단층의 평집
지붕 : 팔작지붕
건물의 모양 : 四角形
누정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칸수 : 정면 - 3칸, 측면 - 1칸
건물 보존 상태 : 양호
문화재 지정 현황 :

 

 曹圭喆 作, 慈溪亭 重建記

慈溪亭者故吾宗慈溪先生藏修之所也盖先生師事鄭塤篪兩叟及李密庵三先生講究乎身心性情之德篤行乎日用彛倫之道俛焉日有所事曾不以膠擾而沮獨處而放推垂於師友之間不斝壽不稱德未卒其志業之大者至今識者頗致恨焉始居新寧之芝峯下復移卜于慈溪之上扁其堂曰慈溪庄而自爲記其言曰泛而觀之則不過因地名而爲之然其義則實有在焉盖慈者仁也仁爲四端之首溪者水也水有盈科之工優遊乎此涵養乎此雖不得爲君子人庶同歸於君子之徒歟觀於此則先生之所以立心而自期者可知也己先生沒之後子孫勢不得不還舊居則庄爲他人之有者百有餘載則此爲庄之故實也後孫諸人爲是之慨更築幾楹於芝峯下側不曰庄而亭之者子孫之寓慕與先生之自名者異也李公泰一作記文金公獻周撰樑頌極其揄揚此爲由庄而爲亭之始末也由庄而亭者在己去甲子則亦爲五十年于玆矣風雨鳥鼠不能無漫漶頹落之患則嗣孫諸人盡心力而新之規模敞焉此爲重建之所由成也不於舊址者雖若可恨然卽先生生長之處子孫世居之里則未有不可况扁仍其舊先生之所取義者未嘗亡焉者乎役旣竣以記命余誼爲族裔玆不敢辭而爲之記亦以寓夙昔慕仰之私云爾 乙卯 冬至節 族裔 圭喆 謹撰
자계정이라는 것은 옛 우리 종인인 자계선생이 쉬지 않고 공부하던 장소이다. 대개 선생께서는 훈수․지수의 양 정 선생 및 이 밀암의 셋 선생을 사사하시며, 심신과 성정의 덕을 강구하시고 일용의 떳떳한 인륜의 도를 돈독하게 이행하여 부지런히 날마다 일하는 바를 힘쓰며 일찍이 요란하게 흔든다고 하여 저지되거나 혼자 처신하더라도 방종하지 않으시고 미루어서 스승이나 벗과의 사이에 드리우셨으나, 불행하게도 수명이 덕망에 걸맞지 아니하여 그분의 뜻하셨던 학업의 큰 것을 졸업하지 못하셨으니,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은 자못 한탄스러움을 이루고 처음에 신령의 지봉 아래 살았으나, 다시 이사하여 자계의 위에 터를 잡고 살며 그 당의 현판을 <자계정>이라고 하고서 자신의 기문도 지으셨으니, 그 기문에 말씀하셨기를 “예사롭게 보면 지명을 인하여 하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뜻은 실제로 있음이 있느니라. 대개 慈라는 것은 仁이요, 仁은 四端의 으뜸이며, 溪라는 것은 물이요, 물은 科目을 채워주는 공부가 있나니, 여기에서 여유롭게 놀고 여기에서 흠뻑 젖어 수양한다면, 비록 군자가 됨은 얻지 못하더라도 거의 군자의 무리들과 함께 돌아가게 되겠지.“라고 하셨으니, 이것을 보면 선생의 마음을 확립하여 자신을 기약하셨음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자손의 형세가 하는 수 없어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왔으며, 자계장이 타인의 소유가 된지 백여 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자계정의 옛 사실이다. 후손들 여러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을 슬프게 여기고, 다시 기둥 몇 개의 집을 지봉의 곁에 잇고는 장이라고 하지 않고 정이라고 하였던 것은 자손들의 우모함은 선생께서 스스로 이름을 붙였던 것과 더불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태일공이 기문을 짓고 김헌주 공이 양 송을 지어 매우 그것을 들추어 찬양하였으니, 이것이 자계장을 연유하여 자계정을 짓게 된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이다. 자계장을 연유하여 자계정을 지은 것이 이미 지난 갑자년에 있었으니, 역시 50년이 된 지금, 비바람과 새나 쥐들에게 물러 터지고 퇴락되는 걱정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 후사의 자손인 여러 사람들이 마음과 재력을 다하여 새로 규모가 훤히 트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중건하여 완성한 까닭인 것이다. 옛 터에 짓지 아니한 것은 비록 가히 한탄스러운 것 같으나, 그러나 즉 선생께서 생장하시던 곳이고 자손들의 세거하는 마을이니, 옳지 않음은 없으리라. 하물며 현판은 그 옛날 선생께서 뜻을 취하셨던 바를 인하여 일찍이 없애지 않았음에 있었겠는가! 역사를 이미 준공하고는, 기문을 짓는 것으로서 나에게 명하기에 일족의 후예가 된 정의로 이렇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를 위하여 기문을 지었으며, 또한 옛날에 사모하며 우러러보던 사사로운 마음을 부쳤다고 하겠노라. 을묘년 동지절에, 족후손 규철이 삼가 쓰다

 

金獻周 作, 慈溪亭 上樑文

淑氣盛於芝谷美哉造物之無窮活水來於橫溪可驗淵源之有自玆因爰居爰處迺謀肯構肯堂恭惟慈溪曺先生林老克肖之孫錦陽私淑之弟天性至孝指使聽於雙現才思絶群詞翰徹於十歲橫經於玉磵之石質疑於密庵之門遊刃爲之恢恢轉草莫不嘖嘖王事赴急任贊晝於倡始之初號召大奇論籌策於倉卒之際極力報佛籌墻之慕益湥殫誠衛賢俳雲之錄自哉晩卜慈溪之籌知是碩人之居風月無邊濂庭之草交翠山水不老武夷之琴高懸葵麥動撓興感於相如之宅鳥獸躑躅舍嗟於醉翁之墟所以諸孫之誠庶竭夙夜由是多士之慕益寓羹墻尋舊於慈川之間爲人所賣更相於芝峰之下實公初居地協靑烏之觀時當玄烏之下雨水縈折白鷗與其同盟大野迷荒碧草爲之齊色用舊材而斧彼苟美苟完破突邱而輪焉盡善盡備旁爲室而備冬燠中爲堂而納光風維昔杖屨之臨乃今琴書之所玆唱巴俚之曲庸助呼耶之音抛樑東雲山深處問於童言師採藥終無見滿地芝香誰與通抛樑西羊壁峩峩白鷗啼舟子茫然尋舊路掉歌閒聽落花迷抛樑南松菊依然古逕三石髮苔湥今百載草堂自此更情舍抛樑北賢岳高高天外特鳳舞龍飛奇絶處過人眞味寄無極抛樑上玉樓瀅澈衆皆仰一輪明月胸中照萬里昭然無礙障抛樑下一帶川流方直瀉太古窩前淸冽水直源不舍可知也伏願上樑之後水不咽而山不嚬依稀復見攀躋之光景鳥如歌而花如笑彷彿更作經濟之風流琴可鼓酒可傾東南之賓客恒滿鬼其護神其騭春秋之弦誦可聞 閼逢困敦驚蟄節 聞韶 金獻周 謹撰右上樑文卽前初作亭之上樑文而今則重建然今之亭卽古之亭故仍揭云


맑은 기운이 지곡에 무성하니 아름답구려! 조물주의 무궁함이요, 활발한 물이 횡계에서 오니 가히 연원함이 여기에서부터 내려옴이 있었음을 증험하겠네. 여기 이에 거처하였음을 인하여, 이에 즐겁게 당실을 짓게 되겠네. 공손히 생각하니 자계 조 선생께서는 임계의 능히 어진 후손이요, 금양을 사숙하셨던 제자이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지시함과 시킴은 쌍현에 맡겼고, 재사가 군중보다 뛰어나 사장이나 한묵은 십 년을 통하였네. 옥간정의 반석에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고, 밀암공의 문하에서 의심남을 질문하였네. 종유하는 칼솜씨가 넓고 넓으니, 되씹으며 누구나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네. 왕실의 일이 위급함에 달려가 창의를 시작하던 처음에 협찬하고 계획함을 맡으셨고, 호소사께서 크게 기특하게 여기며, 황급한 즈음에 이해관계에 계책을 의논하였네. 힘을 다하여 부처에 보답하였으니 주획함은 담장을 보고 우모함이 더욱 깊었고, 정성을 다하여 어진 이를 호위하였으니 배운에 기록됨이 저절로 있었네. 늦게야 자계의 언덕에 터를 잡고 사셨고, 이곳은 석인의 살던 곳임을 알겠네. 풍월은 끝이 없나니 염정의 잡초는 교파로 푸르고, 산수는 늙지 않나니 무이의 거문고는 높이 매달렸네. 폐허에 잡초가 흔들거리니 사마상여의 집에 감회가 일어나고, 새와 짐승이 머뭇거리니 취옹정의 유허에 슬픔을 머금었네. 여러 자손들의 정성이 거의 밤낮으로 다하였던 바이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선비들이 사모함을 국그릇과 담장에 부쳤네. 자계의 사이에서 옛 집을 찾으니 사람들에게 팔려간 바가 되었고, 다시 지봉의 아래에 터를 상보았으니 실제로 공께서 처음 사시던 곳이네. 지세는 청조의 경관과 협화하였고, 시기는 현조의 아래에 해당하였네. 양쪽 물이 얽히어 꺾어지니 백구가 그와 더불어 같이 맹서하고, 큰 평야가 아련하게 넓으니 벽초도 그를 위하여 색채를 가지런히 하였네. 옛 재목을 이용하여 도끼질을 하니 진실로 아름답고 진실로 완벽하였고, 우뚝한 언덕을 부수고 장대하게 지었더니 참으로 좋고 참으로 완비되었네. 곁에는 실을 만들어 겨울에 따스하게 함께 대비하였고, 중앙에는 당을 만들어 광풍이 들어오게 하였네. 오직 옛날에 지팡이를 짚고 거닐며 임하시던 곳이, 이에 지금은 거문고와 서책의 장소가 되었네. 여기 파리의 곡조를 창하여 떳떳하게 호야의 소리를 도우려네. 대들보를 동으로 던지니, 구름과 산이 깊은 곳에서 동자에게 물었으니, 스승님은 약을 캐러갔다고 말하나 끝내 보이지 않는데, 땅에 가득한 지초의 향기는 누구와 더불어 통할까? 대들보를 서로 던지니, 양 벽은 높고 높은데 백구와 울고, 뱃사공은 아득히 옛 길을 찾는데, 뱃사공의 노래는 한가롭게 들리고 떨어진 꽃은 아련하네. 대들보를 남으로 던지니, 소나무와 국화는 옛날 그대로 옛 오솔길이 셋이요, 돌의 털에 이끼가 깊음은 백년인데, 초당이 지금부터 다시 정을 머금었네. 대들보를 북으로 던지니, 보현산은 높고 높아 하늘 밖에 우뚝하고, 봉이 춤추고 용이 나는 기이하고 뛰어난 곳에, 지나가는 사람의 참다운 맛은 끝이 없음에 부갑자년 경칩절에, 문소 김헌주가 삼가 쓰다.
오른쪽의 상량문은 즉, 전에 처음 자계전을 지을 때의 상량문이며, 지금은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자계정은 즉 옛날의 자계정이기 때문에 인하여 걸어 두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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