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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편 - 鏡光書院(경광서원) -

 

▶ 해설

鏡光書院은 1568년(선조 1)에 有定寺 자리에 서당을 창건한 뒤 1662년(현종 3)에 精舍로 개칭하고 栢竹堂 裵尙志(1354-1413) 선생과 慵齋 李宗準(1472-1498)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1649년(인조 27)에 春坡里社를 창건하여 용재 선생과 敬堂 張興孝(1564-1633) 선생을 모셨다. 그런 뒤 1686년(숙종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어 경당 선생의 위패를 옮겨서 백죽당 선생과 용재 선생과 함께 제향했다. 선현 배향과 인재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1873년에 단소를 설립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1972년에 지방유림과 후손들이 발의하여 복원되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식을 갖춘 존현사,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인 숭교당, 신문, 주소 등이 있다. 존현사는 사당으로서 배상지 선생, 이종준 선생, 장흥효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를 치루고 있다. 숭교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며 양쪽 협실은 향사 때에 헌관들과 집사들이 사용하는 방으로서 동쪽은 헌관들이 사용하며 서쪽은 집례, 축관, 집사 등이 사용한다.
【참고 1】 “在府西 金池村東沙川上 古有定光寺 隆慶戊辰(1568)創立書堂”(『永嘉誌』, 권4, 書堂條)
【참고 2】 權泰時는 당시 안동의 鏡光書堂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10가지를 제시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院奴婢의 서원전 私耕을 지적하였다. “本舍奴婢는 이미 身貢이 없고 또 私田을 지급하여 스스로 耕食하도록 하였다. 本舍에 田土를 둔 것이 어찌 奴婢를 공양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가? 지금 이후로 廟直․城上․食母의 私田 외에는 沒數收還하여 公用으로 하는 것이 어떠한가?”(本舍奴婢, 旣無身貢而又給私田, 使自耕食. 本舍之置田土, 豈爲是供養奴婢而設哉! 自今廟直․城上․食母私田外, 沒數收還以備公用, 如何?) (權泰時, 『山澤齋集』 권2, <與鏡光書堂僉座>) 『서원연구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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