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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편 - 景賢書院(경현서원) -

 
위치 :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건축 : 1584년(선조 17) 대곡동에 錦陽書院으로 창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 1609년(광해군 1) 景賢書院으로 사액, 1868년(고종 5) 훼철, 1977년 현 위치에 재건
배향인물 :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김성일(金誠一)
배향일: 2월 15일 

 

▶ 해설

景賢書院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589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시대에는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이었다. 창건 당시의 위치는 나주 서문 밖 대곡동(현 나주시 경현동 근처) 금성산 기슭이었다. 서원은 당시 나주 목사로 부임한 鶴峰 金誠一(1538-1593)이 적극 지원하여 1584(선조 17)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을 모시는 錦陽書院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1589년(선조 22)에 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이 추가 배향되었다. 金宏弼을 포함한 이들 다섯 유학자는 1610년(광해군 2) 9월 문묘에 종사되었기에 ‘東方五賢’이라 한다. 창건 당시 서원은 강당인 會極堂, 동협실 永仁堂, 서협실 精義堂, 西齋 時習齋, 東齋 日新齋, 知遠門 그리고 담 밖에 있는 십여칸의 창고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서원을 중건했으며, 이듬해인 1609년에 ‘景賢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1693년(숙종 19)에는 高峰 奇大升(1527-1572)과 金誠一을 추가 배향했고, 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현재의 위치인 영안 마을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현재 서원의 건물들은 강당 영역과 사당 영역으로 나뉘어 동북향하여 배치되었다. 전면에 위치한 강당 영역은 외삼문과 강당으로 구성되었다. 외삼문은 솟을문이며, 강당은 정면 네 칸, 전후로 툇간이 더 달린 측면 한 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당 전면은 툇간으로 구성되어 외부로 트였으며, 중앙에 두 칸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온돌방 협실이 각 한 칸씩 있다. 사당인 景賢祠는 강당 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신문은 형삼문이고, 사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의 전면 반 칸은 퇴를 이루며 외부로 트여 있고, 내부 북벽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기대승․김성일의 위패가 좌에서 우로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5일에 향사를 지낸다.
【참고】학봉과 전라도의 인연 학봉이 46세때인 1583년에 전라도 羅州牧使로 발령받아, 3년간 목사를 지내면서 나주 최초의 서원인 大谷書院(후에 경현서원으로 바뀜)을 금성산 밑의 대곡동에 설립하였던 것이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의 뿌리깊은 도시에 와서 학문의 요람인 서원을 세웠다는 것은 음미해 볼 만한 사건이다. 전라도라는 이름도 전주와 나주에서 따온 이름인 만큼 나주는 비중있는 고장이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나주에서 배출된 정승 숫자가 8명에 달한다. 나주는 또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산강을 통한 수상운송의 중심지여서 물산이 풍부하였고 큰 부자도 많았다. 부와 권력을 모두 쥐고 있던 곳이라 고려시대 이래로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나주에서 경상도 사람인 학봉이 다른 시설물도 아닌 서원을 세운 것은 그만큼 학봉이 전라도 사람들로부터 학문과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봉은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인 의사소통 방법을 사용하여 막혀있는 민심을 소통시켰다. 학봉은 큰 북을 달아놓고 “누구든지 억울한 일을 당하여 호소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 북을 쳐라”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 억울한 사람들이 이 북을 쳐서 아래와 위가 서로 이롭게 되어 민심이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학봉이 대곡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나주의 토착세력이면서 명문이었던 羅州 羅氏들의 전격적인 후원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씨들은 호남의 남인집안으로서 학봉 집안과는 학풍뿐만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같았던 것이다. 대곡서원의 설립으로 인해서 철학적인 성찰을 중요시하는 영남학풍과 문학적인 풍류를 우선시하는 호남학풍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학봉이 세운 나주 대곡서원의 존재는 각기 다른 영호남 학풍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되는 파이프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후일(1693년) 학봉은 고봉 기대승과 함께 호남인들에 의해 대곡서원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디지털조선일보 2002.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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