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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嘯皐集 -

 

 嘯皐先生續集序

我朝穆陵之世 治化郅隆 羣喆駢肩 如盧蘇齋 奇高峯 具柏潭諸公 以德行文章 冠冕一世 而嘯皐朴公先生亦其一也 先生風儀峻整 宇量恢宏 以敏妙超絶之資 加淬琢種積之功 旣釋褐立朝 歷踐華官 皆極一時之選 而直言正色 不肯毁方瓦合 遂不能久於朝 而低徊於海邑朱墨之間 使學道愛人之化 專而不能咸 及其解而歸田 則四方之志 已倦矣 俯仰圖書 訓誨後進 以淑諸一方 暇則優游泉石 嘯詠娛賞 泊然無意於世 而愛君憂國之思 往往發於應酬之際 於是 人知先生之不果於忘世也 先生蚤登陶山之門 捧書質疑 亟蒙師席之印可 尤用力於易論語 硏精覃思 究極微奧 所著有孔門心法 綱目心法 疑禮講錄 至如星歷籌數之法 亦皆精透妙悟 以極其趣 非其資質之高 硏索之深 豈能盡其博而造其奧哉 嗟夫 天之生先生 固將以有意於斯世 而進旣不能展布所蘊 以賁餙皇猷 退而未及立言著書 開後學於無窮 而心法諸書 又湮滅而不傳於世 雖欲溯求其造詣淵源之實 而不可得 豈非後學不盡之憾哉 雖然 游先生之門如金柏巖金勿巖李省吾任龍潭金苟全諸公 得以傳受旨訣 倡導後進 其遺風餘敎 藹然被於一邦 歷數百年而不泯 先生之道 抑不可謂不傳於世 而不恨於當日之抱道而未試也 先生所著詩文若干卷 已見行於世 其散佚不傳者亦多 非先生之至者也 然皆精神咳唾之所寓 至如十漸疏 其責難防微 惓惓盡忠之誠 可爲百代帝王之至戒 不可以莫之傳也 先生後孫希天時龍 屬象靖以勘校 而俾弁諸卷端 自顧眇然後生 無所識知 何敢僭易犯手 以自陷於不韙之罪 顧其請益勤 則以先輩所爲狀銘爲按据 而竊附所感於心者 以寓平生執鞭之慕云 歲辛丑十月日 韓山李象靖序
우리 조선의 목릉성세(목릉성세)에 나라의 교화(교화)가 융성하여 현인(현인) 들이 많이 활동했으니, 예를 들면 소재(소재) 노수신(노수신)․고봉(고봉) 기대 승(기대승)․백담(백담) 구봉령(구봉령) 등 여러 사람이 덕행(덕행)과 문장(문 장)으로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는데, 소고(소고) 박승임(박승임) 선생 또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생은 풍모(풍모)와 의범(의범)이 높고 가지런했으 며 기국(기국)과 도량(도량)이 넓고 관대했다. 민첩하고 뛰어난 자질에다 각 고(각고)의 공부를 더하여 포의(포의)를 벋고 조정에 출사(출사)해서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모두 한 때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직언(직언)과 정 색(정색)으로 일관하여 간사한 무리들과 기꺼이 야합하지 않았다. 드디어 조 정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바닷가 마을의 수령으로 옮겨 다녔지만 도학(도학)과 애민(애민)의 교화를 둘 다 온전히 할 수 없었는데,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는 천하에 대한 포부는 이미 권태로워 졌다. 그래서 서적을 열람하고 후진을 훈도하여 한 지방을 교화하고 여가가 있으면 자연[천석]을 유람하여 시를 읊으며 노닐어 담담하여 세상에 뜻이 없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애민․우 국에 대한 생각을 술자리에서 가끔 이야기 했으니, 사람들이 그제야 선생이 진정 세상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생은 일찍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책을 들고 질의하여 자주 스승의 인 가를 받았다. 더욱 『주역』 『논어』에 힘을 쏟아 정미롭게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여 은미한 부분까지 궁구했으니 『공문심법(공문심법)』 『강목심법』 『의례강록(의례강록)』 등의 저술이 있다. 또 역법이나 점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묘한 이치에 통달하여 그 뜻을 지극히 했으니, 그 기질이 높고 연구 함이 깊지 않으면 어찌 능히 그 방대함을 다하여 그 깊은 이치에 이를 수 있겠는가. 아! 하늘이 선생을 낳음은 진실로 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일 것인데, 나아가서는 온축한 바를 펼쳐 임금의 정사를 도우지 못하고 물러 나서는 말을 세우고 책을 저술하여 길이 후학을 개발하기에 미치지 못했다. 또 『공문심법(공문심법)』을 비롯한 책들도 인몰(인몰)되어 세상에 전하지 않아 비록 비록 그 조예와 연원의 실상을 소급하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 으니, 어찌 후학의 다하지 않는 근심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선생의 문하에 유학한 김백암(금백암)․김물암(금물암)․이성오(리성오)․임용담(임룡담)․ 김구전(금구전) 등과 같은 사람들이 지결(지결)을 전수하고 후진을 창도하여 그 유풍의 나머지 교화가 한 지방에 성하게 퍼져 수백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선생의 도(도) 또한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고 당일에 도(도)를 품고도 시험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할 필요 없을 것 이다. 선생이 지은 시문(시문) 약간 권이 이미 세상에 유행되지만 그 산일(산일)되 어 전하지 않는 것 또한 많으니 선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정신과 생각이 깃들어 있고 <십점소(십점소)>같은 글에 이르러서는 그 혼란함을 책 (책)하고 은미함을 막아 부지런히 충성을 다하여 백대 제왕의 지극한 경계가 될 만하니, 전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선생의 후손 희천(희천)․시룡(시룡)이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서문을 짓게 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아득한 후생이 아는 바가 없으니, 어찌 참람하게 쉽게 손을 대어 불경의 죄에 빠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부탁이 더욱 간절 하기에, 선배들이 지은 행장과 묘갈명 등을 참고하고 마음에 느낀 바를 가만 히 붙여 평소 사모하는 정성을 붙인다. 신축년 10월 일 한산(한산) 이상정(리상정)은 서문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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