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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錦溪集 -

 

 錦溪集解題


저자의 유문은 退溪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文集 2권 詩集 2권이 집안에 가장되어 있다.’라 하였으니, 본래 4권 분량의 시문집이 가장되어 있었다. 丹陽 郡守 孫汝誠이 저자의 아우 黃秀良과 함께 유집을 수습하여 퇴계에게 편차를 부탁한 것도 이 家藏本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遺集이 丹陽에서 간행된 것은 저자가 일찍이 단양 군수로 재임 시 貢賦의 감면을 얻어 내 이 고을에 큰 은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與趙士敬書 甲子〉의 ‘見閱錦溪集 欲改吳訥誤稱處而忘其齋號…’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1564년부터 문집의 교열을 시작하였으며 편차를 마친 뒤 李山海에게 발문을 쓰도록 부탁하였다. 이 퇴계교정본 4권을 단양 군수 孫汝誠이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초간본의 정확한 간행 시기는 알 수 없으나 孫汝誠이 1566년 12월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 단양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즉 1564년에서 1566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단양 군수로 부임한 黃應奎가 1584년 초간본을 검토하고 잘못된 글자 13자를 정정하여 追刻한 뒤 識를 남겨 놓았다.   1607년 鄭逑가 安東 府使로 부임하여 초간본에 수록되지 못한 유고를 모아 外集 8권으로 편차 교수하고 손수 淨書하여 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곧 이임하게 되자 정리한 고본을 本孫家에 맡겼다.   그 후 丹陽의 초간본 판목이 화재로 인하여 많이 소실되자 저자와 李滉을 배향하고 있던 豐基 郁陽書院의 洞主인 李萬華가 원중의 유생들과 저자의 문집을 중간할 것을 의논하여 재물을 마련하고, 저자의 宗孫 黃尙鏵가 일을 주간하였다. 도중에 이들이 죽자 上舍 金翼景이 종손 黃潤德과 함께 간행하는 일을 맡아 李光庭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1755년 이광정은 鄭逑와 退溪의 편차를 존중하는 뜻에서 중간시 內集과 外集을 합하여 재편하지 않고 본래의 체제 그대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다만 뒤에 행장과 만사 등의 글을 부록으로 실었을 뿐이다. 이 중간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晚松D1-A1181), 성균관대학교 도서관(D3B-137a), 규장각(古3428-522)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55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장본이다. 본 문집은 目錄, 內集 5권, 目錄, 外集 9권 합 5책으로 되어 있다. 內集 권수에는 1권부터 4권까지의 목록 6板이 실려 있다.  권1~3은 詩이다. 약 200餘 題의 시가 詩體에 관계없이 권별로 저작 시기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저자와 퇴계와의 관계를 반영하듯 退溪에게 보내거나 차운한 시가 가장 많고, 그 외 門人들과 주고받은 시, 扶餘 등 고적을 기행한 시 등이 실려 있다. 간간이 시 말미에 작자의 주가 붙어 있다. 권4는 雜著로 記, 書, 祭文, 疏, 跋 등이다. 저자의 문은 시에 비해 분량이 적으나 퇴계는 內集을 편차하면서 ‘이 사람은 文이 詩보다 뛰어나 論事가 명쾌하고 훌륭한데 그런 점을 평시에는 미처 다 알지 못했었다. 이제 그의 글을 보니 참으로 애석하다.’고 평하였다. 書는 저자가 增修한 迎鳳書院의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보낸 것이 많고, 〈請革兩宗疏〉는 文定王后가 普雨를 등용하여 佛敎의 부흥을 꾀하고 禪宗과 敎宗을 부활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이다. 〈晦菴書節要跋〉은 퇴계가 정리한 「朱子書節要」를 저자가 星州 牧使로 있을 때 간행하면서 지은 발문이다. 권5에는 李山海의 跋과 1584년에 쓴 黃應奎의 識가 실려 있다. 그런데 목록에는 권5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뒤에 追刻된 것으로 보인다.  外集 권수에는 권1에서 권8까지의 목록 17板이 실려 있다.  권1~6은 詩이다. 역시 內集의 편차방식과 같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중 권1의 〈遊頭流山紀行篇〉은 1545년 4월에 지리산을 유람한 장편시이며, 권2의 〈集勝亭十詠〉은 巫山一段雲體로 지은 것이다. 권3에는 <外王父敎授挽〉, 〈聘母李氏挽〉 등의 장편 挽詩가 실려 있으며, 권4에는 〈湘靈鼓瑟〉, 〈疑塚〉 등의 月課로 지은 시가 실려 있다. 〈次眞安鴨脚臺〉 이하는 南征錄으로 1551년 경상도 監軍御史가 되어 그 지방 고을을 순행할 때 지은 시집이다. 권5에는 1557년 2월 7일 竹嶺을 넘고, 8일에 黃江을 지나고, 9일에 㺚川을 건너는 등의 과정을 시로 읊은 기행시가 실려 있다. 권6에 실려 있는 〈復次曹牧韻〉 이하는 拾遺이다.  권7~8은 疏, 箋, 書, 雜著, 祭文, 墓誌(聾巖先生墓誌銘), 對策이다. 이 중 〈丹陽陳弊疏〉는 1557년 단양 군수가 되어 고을을 피폐시키는 열 가지 폐단을 조목별로 상소한 것인데, 이 상소로 인하여 丹陽은 10년 동안 貢賦를 감면받게 되었다. 〈上退溪先生問目〉은 1563년 「心經」과 「近思錄」에 관해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내용과 퇴계의 대답이다. 文 중에는 聾巖 李賢輔를 대신해 지은 글이 많은데 이는 저자의 장인 李文樑이 바로 聾巖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권9는 부록으로, 行狀(李滉 撰), 祭文 5편, 挽詞 2편, 李滉이 쓴 錦陽精舍完護記文 1편과 이에 대한 柳雲龍의 跋이 부기되어 있다. 권말에는 중간본의 간행 경위를 자세하게 기술한 1755년에 쓴 李光庭의 跋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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