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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寒岡集 -

 

 寒岡先生文集序

先生生星州沙月鄕 明肅皇帝嘉靖二十二年七月壬子也 諱逑 字道可 姓鄭氏 牧隱敍傳西原大姓者也 上世有大將軍顗 高麗世 以忠節著聞 自僉議贊成瑎淸河君㥽左諫議大夫誧進賢館大提學樞 至政堂文學摠 以文學相傳五世 又五世有思中 賢而不出 鄕黨稱至行 寒暄堂金先生之外孫也 娶星州李氏 生先生 以名臣之世 隱德不昌 後世必有達者是也 先生兄适崑壽皆貴用 崑壽 昭敬世 封西川君 以耆德稱者也 先生少好禮 發憤讀書 從吳德溪先生 受易乾坤文言 二十一 初見陶山李先生 講心經 道旣通 遠近皆師之 昭敬王六年 選才學士 修撰金宇顒白上曰 有鄭逑者 少遊李滉曺植之門 明於經術 可以布衣召問治道也 上特召除官不起 蒼坪作寒岡精舍 家禮輯覽補註成 後拜昌寧縣監 先生三十八 上召見 問曰 李滉曺植 其學何如 對曰 滉德厚而學純 學者可易以尋入 植特立獨行 學者難以爲要也 上又問大學踐行宗旨 對曰 先儒言天德王道在愼獨 而立志與有爲爲貴 上稱善 旣之縣 修祀田 行鄕射鄕飮酒養老之禮 一年 監司報政最 以持平召之 辭去 五年 大召儒學 校正小學四書口訣 先生召至京師 明年 爲咸安郡守 問舊俗修廢政表善行 治敎大行 二年歸 四年 有倭寇連陷三京 上西狩 國大亂 時先生爲通川 起義兵伐賊 傳檄郡縣 上兄河陵君避亂 山中爲亂民所迫死 而亂者匿之 不知屍處 先生因問囚得之 收殯以聞 上爲之於悒歎息而言曰 無以報德 特拜江陵府使 一年歸 以承旨召 公入侍經筵 上問易程傳本義何先 對曰 易之道 明乎消長盈虛之理 不失時中者也 徒以卜筮前知而已者 末也 程傳先也 明年 出爲關東觀察使 方兵革未定 受命築鴒原城 以爲關東保障 置元冲甲祀壇 至江陵 祭國殤 下令諸郡縣 皆掩髂埋胔 寧越審魯陵 原州祭隱者元天錫墓 上旣還都 賊屯海上 聲言再擧 諸王子妃嬪 皆在成川 成川古卒本扶餘 山深阻阨 賊路遠故也 時先生爲成川 上戒諸王子曰 警戒謹飭 毋得過於賢大夫 三年 懿仁王后薨 將葬 有妖言 上疏論山陵事 二年 爲忠州 北江祭國殤 月餘謝歸 是歲被召 校正經書義五先生禮說心經發揮成 絶鄭仁弘 武屹精舍成 在修道山中 山高谷深 今有武屹藏書 四年 有安東之命 一年歸 明歲 光海君立 特拜大司憲 於是 三司告臨海君有變 爭言置法 而事皆無實 而積疑已成 先生上疏諫曰 先王末命在耳 先嬪早世 兄弟二人 寢食不離 殿下至情 尤有不忍焉者 獄不必盡究 人不必盡問 罪不必盡覈 法不必盡施也 旣獄成 國人寃之 先生連上箚自劾曰 臣望殿下全彛倫之至愛 而物議愈騰 以全恩爲非 臣貪榮冒祿 大失人臣去就之義 遂辭去 於是 禮曺問大喪喪服之禮 有講定喪禮十八條 五年 有逆竪朴應犀者上變告 國舅延興家旣族滅 永昌才八歲當置法 而又有母后異宮別處之議 先生復上疏曰 昔周景王時 賊臣擔括作亂 欲立王子侫夫 侫夫實不知擔括欲立己也 旣事發 擔括出奔 尹言多劉毅等五人 共殺侫夫 非王命也 孔子書之曰 天王殺其弟侫夫 侫夫之死 初不出於景王 特莫之禁也 左氏曰 罪在王也 穀梁氏曰 甚之也 杜預曰 殘骨肉也 爲景王之累何如也 景王之過 五大夫成之也 今日之事 稚然無識 又非但侫夫之不知也 論者必欲奉命者 又不甚於景王之莫之禁也歟 其欲使殿下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也 又曰 父子大恩 古之人臣 以過宮伏地積誠 格君勉君 今之言者 乃以別宮異處請焉 此臣所未曉者也 殿下必以舜之心爲心 恭爲子職 無變於前日之所事者 爲舜亦不越乎是也 於是 永昌旣見殺 而大妃閉之西宮 供奉朝謁皆廢 宗室大臣諸大夫諫者 皆得罪 先生更欲盡言極諫 以爲爲宗社之大逆 負天下之大罪者 孰有如武曌者也 張栻以當時不廢爲言 朱熹曰 在中宗則不敢爲出母之事 壞大義毁大防 以循今日之論 則殿下他日地下 將何以有辭於先王 出入太廟 亦何以爲顔於薦享乎 草疏未上 柳瀹疏批下 有曰鄭逑首發全恩之說 掠美名 亂是非 爲不忠不義 先生知不可諫而乃止 二年 五服沿革圖成 顯皇帝萬曆四十八年 先生七十八 其正月甲申 先生寢疾五日而歿 四月葬蒼坪 弟子皆服三年 先生謙下有禮 敦厚忠信 身爲禮義之王 四方學士宗師之 南方自古稱君子之邦 今先生之鄕 又去先生未遠 餘敎不亡 人心安善俗 重爲邪知禮讓 擬於鄒魯云 先生死之四十四年 改蒼坪之葬 改葬之墓 州北五里印懸大葬是也 先生遺文十一卷 其文皆裨益於斯學斯文 如編類五先生禮說心經發揮禮記喪禮分類家禮輯覽補註五服沿革圖 率皆開牖後學 而又戊申癸丑全恩箚 出於至誠惻怛 爲百代之敎 自古 富貴者 當時則榮 歿則已焉 先生以布衣歿而彌彰者此也 今世代漸遠 當時諸弟子皆老死 晩世末學及門者穆 少先生五十二歲 今年八十有六 朝夕且死 忘其僭越 正其訛誤 考定編類 以爲寒岡先生文集上之六年下浣 門人陽川許穆序


선생은 성주(星州) 사월리(沙月里)에서 태어났으니, 명(明)나라 세종 숙황제(世宗肅皇帝) 가정(嘉靖) 22년(1543) 7월 임자일(9일)이다. 휘는 구(逑), 자는 도가(道可)이고 성은 정씨(鄭氏)로, 곧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술한 <정씨가전(鄭氏家傳)>에서 ‘서원(西原 : 충청도 청주의 옛이름)의 대성(大姓)이다’라고 한 가문이다. 윗대에 대장군(大將軍) 의(顗)는 고려조에 충절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 뒤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해(瑎), 청하군(淸河君) 책(㥽),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포(誧),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추(樞)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총(摠)에 이르기 까지 5대에 걸쳐 문학으로 전해 내려왔다. 또 5대를 지나 사중(思中)은 어진 덕을 지니고도 세상에 나가지 않아 고을에서 행실이 독실하다고 칭송했으니, 곧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외손이다. 이 분이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으니, ‘명신의 가문에 덕을 숨기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면 그 후대에 반드시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는 옛말이 이 경우이다. 선생의 형인 정괄(鄭适)과 정곤수(鄭崑壽)도 모두 나라에 높이 등용되었는데, 정곤수는 소경대왕(昭敬大王 : 宣祖) 당시 서천군(西川君)에 봉(封)해져 노성(老成)하고 덕망이 있다고 칭송 받은 사람이다. 선생은 어려서 예(禮)를 좋아하여 의욕적으로 글을 읽었는데, 덕계(德溪) 오건(吳健) 선생을 따라 『주역(周易)』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의 문언(文言)을 배웠다. 21세 때 처음 도산(陶山) 이황(李滉) 선생을 만나 『심경(心經)』을 강론했는데, 도(道)가 통한 뒤에는 각지에서 모두 스승으로 모셨다. 소경대왕 6년(1573) 재주와 학문을 갖춘 선비를 선발할 적에 수찬(修撰) 김우옹(金宇顒)이 임금께 아뢰기를, “정구(鄭逑)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려서부터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경술(經術)에 밝으니, 포의(布衣)로 불러와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물어볼 만 합니다.”라 했다. 그래서 임금이 특별히 불러 벼슬을 제수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창평산(蒼坪山)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짓고 그곳에서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를 편찬했다. 그 뒤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 38세였다. 임금이 불러 접견하고 “이황과 조식은 그 학문이 각기 어떠한가?”라 물었는데, “이황은 덕이 후하고 학문이 순수하여 배우는 자가 그 길을 찾아들어가기가 쉽고, 조식은 우뚝 서고 혼자 앞서나가 배우는 자가 그 요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라 대답했다. 또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지(宗旨)에 대한 임금의 물음에 “선유(先儒)의 말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신독(愼獨)에 있다’라 했으니, 뜻을 세워 실행하는 것이 귀합니다.”라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좋다고 치하했다. 창녕에 부임해서는 사당에 제향을 올리는 제도를 다듬어 고치고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양로례(養老禮) 등을 시행했다. 재임한 지 1년 만에 감사(監司)가 조정에 그 치적이 으뜸이라고 아뢰어 임금이 지평(持平)으로 불렀지만, 사양하고 떠났다. 5년 뒤에 조정에서 유학자를 대대적으로 불러 모아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의 구결(口訣)을 교정할 때 선생도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갔다. 이듬해 함안 군수(咸安郡守)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옛 풍속을 되찾고 무너진 정사를 바로잡으며 선행(善行)을 표창하니, 정사와 교화가 잘 시행되었다. 재임한 지 2년 만에 돌아왔다. 4년 뒤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삼경(三京 : 경주․서울․평양)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임금은 서쪽 의주(義州)로 피난길을 떠나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 당시 선생은 통천 군수(通川郡守)로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적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돌렸다. 이때 임금의 형인 하릉군(河陵君 : 李鏻)이 피난하던 중 산속에서 난민(亂民)에게 살해되었는데, 난을 일으킨 자가 시신을 숨겨 그 소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살해한 죄수를 심문하여 시신을 찾아내고는 염을 하여 가매장한 뒤에 조정에 아뢰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서 울먹이며 탄식하고 말하기를 “무엇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겠다.”라 했다. 그래서 특별히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했는데, 부임한 지 1년 만에 돌아왔다. 승지(承旨)로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공이 조정으로 들어가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론할 때 임금이 『주역』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주역』의 도(道)는 소장(消長)과 영허(盈虛)의 이치를 밝혀 그때그때 중도(中道)를 잃지 않은 것이니, ‘그저 점을 쳐 미래의 일을 아는 것일 뿐’이라는 말은 지엽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니 정전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라 했다. 그 이듬해 지방으로 나가 관동 관찰사(關東觀察使)가 되었다. 이 당시 아직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때라서 왕명을 받고 영원성(鴒原城)을 축조하여 관동의 방어장치로 삼고, 원충갑(元冲甲)의 제단(祭壇)을 설치했다. 강릉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은 주검을 제사지내고 각 고을에 명을 내려 도처에 널린 시신을 빠짐없이 거두어 매장하도록 했다. 영월(寧越)에서는 노릉(魯陵 : 단종의 능)을 봉심(奉審)하고, 원주(原州)에서는 은자(隱者) 원천석(元天錫)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도 적들은 해상(海上)에 머무르면서 다시 침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서 여러 왕자와 왕비․후궁들은 모두 성천(成川)에 남아 있었으니, 성천은 옛날의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산이 깊고 험난하여 적이 오가는 길과 멀기 때문이었다. 이때 선생은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었는데, 임금이 여러 왕자에게 경계하기를 “몸가짐을 조심하고 삼가서 어진 대부에게 허물을 얻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3년 뒤 의인왕후(懿仁王后 : 선조의 비 박씨)가 죽어 장사를 치르려고 할 때, 지관(地官)이 요망한 말을 꺼내 큰일을 망치려 하므로, 상소하여 산릉(山陵)에 관한 일을 논했다. 다시 2년 뒤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서는 북강(北江)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주검을 제사 지내고, 한 달 남짓하여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다시 나가 『경서의(經書義)』를 교정했다. 그 뒤에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과 『심경발휘(心經發揮)』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인홍(鄭仁弘)과의 관계를 끊었다. 수도산(修道山) 속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었는데,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으로 오늘날까지 무흘장서(武屹藏書)가 남아 있다. 그 뒤 4년이 지나 명을 받고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해서는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을 제수되었다. 바로 이때 삼사(三司)가 임해군(臨海君 : 광해군의 庶兄 李珒)이 변란을 일으켰다고 고하고 국법으로 처단할 것을 앞 다투어 진언했는데, 거론한 일들이 하나같이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없었음에도 짙은 혐의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간하기를, “선왕께서 임해군을 잘 보살펴 주라고 하신 유언이 아직 귓전에 맴돌고 선빈(先嬪 : 임해군의 어머니 김씨)께서 일찍이 세상을 떠나 두 분 형제께서는 잠자리에 들 때나 수라를 드실 때나 서로 떨어지지 않는 실정이니, 전하의 지극하신 정의(情誼)로 볼 때 더 한층 감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옥사는 다 조사할 필요 없고 사람은 끝까지 심문할 필요 없으며, 죄상을 다 따져 밝힐 필요도 없고 국법을 굳이 유감없이 시행할 필요도 없습니다.”라 했다. 결국 성옥(成獄)이 되자 온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생각했는데, 선생은 계속 차자(箚子)를 올려 자책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천륜의 지극한 사랑을 온전히 보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오히려 더욱 비등하여 은정(恩情)을 보전하는 것을 잘못이라 하고, 신은 마침내 영화와 녹을 탐함으로써 신하가 지켜야 할 거취의 의리를 잃었습니다.”하고, 사직하고 떠났다. 이 당시에 예조가 국상(國喪)을 치를 때 적용할 상복(喪服)에 관한 예법을 물어와 그에 답했고, 상례(喪禮) 18조항을 강정(講定)하기도 했다. 그 뒤 5년이 지나 역적 박응서(朴應犀)란 자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변(告變)하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 김제남의 봉호)의 집안이 멸족의 화를 당했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이때 겨우 8세였는데 극형을 받을 상황인데다가 또 모후(母后)를 별궁에 따로 거처하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아뢰기를, “저 옛날 주 경왕(周景王) 때 적신(賊臣) 담괄(擔括)이 반란을 꾸며 왕자 영부(佞夫)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는데, 영부는 사실 담괄이 자기를 옹립하려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일이 탄로나자 담괄은 도망가고 영부는 윤언다(尹言多)와 유의(劉毅) 등 다섯 사람의 주도하에 죽임을 당했으니, 그 죽음은 왕명이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춘추(春秋)』에서 그 사실에 관해 ‘천왕(天王)이 그의 아우 영부를 죽였다’라 했는데, 영부의 죽음은 애당초 경왕의 뜻이 아니었고 다만 그것을 막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좌씨(左氏)는 ‘죄는 왕에게 있다’라 했고 곡량씨(穀梁氏)는 ‘왕이 지나쳤다’라 했으며, 두예(杜預)는 ‘골육을 해쳤다’라 했습니다. 그러니 경왕이 지은 허물이 과연 어떠합니까. 경왕의 허물은 저 다섯 명의 대부가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사리를 모르는 어린 아이에 관한 것으로서 일의 내용을 미리 몰랐던 저 영부의 경우보다 더 억울하고, 지금 죄를 주자고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임금의 명을 받들고자 하니, 임금께서 그대로 따르신다면 그 허물이 또 어찌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경왕보다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서 우리 전하로 하여금 장차 어떻게 천하와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라 했다. 또 아뢰기를, “부자간은 지대한 은정이 있는 사이입니다. 옛날의 신하들은 궁궐 앞을 지나갈 때 땅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고 정성을 끊임없이 쌓아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임금의 느슨한 정신을 격려했는데, 오늘날 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리어 별궁에 따로 거처하게 하자는 것으로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곧 신이 알 수 없는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순(舜) 임금이 지녔던 마음을 전하의 마음으로 삼아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다하심으로써 전일에 섬기셨던 효성을 변치 마소서. 순 임금과 같은 성군(聖君)이 되시는 것도 이와 같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라 했다. 이윽고 영창대군이 살해되고 대비(大妃)는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아랫사람이 봉양하는 일이나 백관이 찾아뵙는 예가 다 폐지되고 종실(宗室)의 대신과 여러 대부 가운데 반대했던 자들이 모두 죄를 얻었다. 선생은 다시 할 말을 다하여 충심으로 간언(諫言)하고자 상소문을 쓰기를, “종묘사직에 큰 역적이 되고 천하에 큰 죄를 진 사람을 말하자면 당(唐)나라 무조(武曌)와 같은 자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장식(張栻)은 그 당시에 무조를 폐하지 않았던 것을 잘못이라고 말했으나, 주희(朱熹)는 ‘자식인 중종(中宗)의 입장으로서는 감히 어머니를 내쫓는 처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라 했습니다. 대의(大義)를 무너뜨리고 대방(大防)을 훼손하여 오늘날 내세우는 주장을 그대로 따르신다면, 전하께서는 후일 지하에서 선왕께 무슨 할 말이 있겠으며 종묘에 출입하실 적에 또 무슨 얼굴로 제향을 올리겠습니까.”라 했다. 상소문을 써놓고 미처 올리기도 전에 유약(柳瀹)이 올린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 가운데 “정구는 ‘은정을 보전하자’는 설을 맨 먼저 꺼내어 미명(美名)을 차지하고 시비를 어지럽혔으니, 충성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더 이상 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상소를 그만두었다. 그 뒤 2년 만에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가 완성되었다. 명(明)나라 현황제(顯皇帝) 만력(萬曆) 48년(1620)은 선생의 나이 78세가 되는 해인데, 그해 정월 갑신(甲申)에 병세가 깊어져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1) 4월에 창평(蒼坪)에 장사 지내고 제자들은 모두 삼년복을 입었다. 선생은 겸손하고 예(禮)를 지녔으며 덕성이 후하고 진실하여 예의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사방의 학사(學士)들이 으뜸으로 추앙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남쪽지방은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로 불려왔다. 지금 선생의 고을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그 끼친 가르침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인심이 선한 풍속을 편안히 여겨 부정한 짓을 매우 꺼리고 예법과 체면을 알아 공자의 고향인 저 중국의 추로(鄒魯) 고장과 견줄 만하다고 한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창평산(蒼坪山)에 자리잡았던 묘소를 개장(改葬)했는데, 개장한 묘소는 성주(星州) 관아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인 인현산(印顯山)에 있다. 선생이 남긴 글은 11권인데 그 글은 모두 사학(斯學)과 사문(斯文)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따로 편찬한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심경발휘(心經發揮)』,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등은 다 후학을 깨우쳐 열어준 저술이고, 아울러 무신년(1608)과 계축년(1613)에 골육간의 은정을 보전하라는 뜻으로 올린 전은 차자(全恩箚子)는 못내 애처로운 지극한 충정에서 발로된 것으로 장차 백대(百代)를 두고 가르침이 될 것이다. 예로부터 부귀를 누린 자는 그 당시에는 영화를 누리지만 죽고 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평범한 신분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 한층 더 드러났으니, 이는 위와 같은 학문과 도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대가 차츰 더 멀어져 당시의 제자들은 모두 늙어서 죽었고, 늦게 태어나 말학(末學)으로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 나 허목(許穆)은 선생보다 52세가 적은데, 올해 나이가 86세로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다. 그래서 내 분수에 참람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문집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선생이 따로 편찬한 유서(類書)를 살펴 확정하여 『한강선생문집(寒岡先生文集)』을 완성했다.
금상(今上 : 숙종) 6년(1680) 하순에 문인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서문을 적다.
1) 연보에는 정월 1일에 병세가 깊어지고 5일인 갑신일 유시(酉時)에 별세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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