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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東岡集 -

 

 東岡先生文集跋

聖人作易 通幽明之故 明淑慝之辨 以陽爲君子 引翼而扶護之 以陰爲小人 排擯而抑黜之 蓋陽之德剛 故賦於人而爲德者 皆正大而光明 陰之德柔 故稟其氣而降生者 多幽暗而奸慝 此先聖所以有剛毅近仁之說 而發未見剛者之歎也 嗚呼 若吾金文貞公東岡先生者 眞大易所稱陽剛君子之德 而孔子所謂吾未之見者哉 先生早遊南冥之門 已知君子立身行己出處進退之義 旣又從退溪李文純公 得聞聖賢相傳道統眞訣 乃知持敬窮理爲入人道進德之要 於是沈潛反復 以精其義 整齊嚴肅 以飭其躬 迨其德成行尊 措諸行事 則其忠誠仁愛 剛直方嚴 無一不本於道義之正 故策名之初 其所樹立已不苟 西厓柳文忠公貽書相賀 至有黃鵠壤蟲之歎 及其以南床承召對也 首陳危微精一之義及以禮制心以義制事之說 蓋其初見君父 便論說及此以爲之兆 可見其有堯舜其君 挽回三代之志矣 其在論思勸講之職 則凡因文敷衍 闡發經旨者 皆是陳善閉邪 引君當道之義 其在諫諍風憲之任 則凡有懷必達 犯顔苦口者 莫非振肅綱維 彰善癉惡之論 其典敎成均也 專以修明學制 育材興化爲務 其分符按節也 必以勤恤民隱 承流宣化爲先 至於引對咨訪 因事獻規 無非引經據禮 將順匡救之言 公平正大 鎭定朝著之意 今其奏議諸篇 固無讓於董江都陸宣公之規模 經筵陳說 宛然有程朱晦退格君之遺範 嗚呼盛哉 宣祖初年 眷注方深 屢蒙嘉奬 惟其天賦剛正 嫉惡如讐 嘗於筵中 直斥鄭澈回邪奸毒之狀 歷陳李珥偏私護黨之失 大爲時論所擠 終不得一日安於朝廷之上 未盡展布其所蘊 爲可慨已 先生愛君憂國之誠 終始如一 惓惓不忘 而素性恬淡 宦情如寄 一資一級之越例遷進 必抗章而辭 一言一事之少違素心 輒奉身而退 亦可見剛毅果斷 無一豪顧戀之私矣 己丑投荒之禍 實出兇邪構捏之餘 駭機溢目 飛語喧騰 人皆驚懼失措 先生怡然不以爲意 略無幾微見言面 豈所謂直須談笑於死生之際 而任彼鐵輪頂上轉旋者邪 先生於防微謹獨之工 常常提掇 雖造次顚沛之間 未嘗一日放過 至於遐荒鵩舍窮厄之際 亦必以退陶先生所書思無邪毋不敬毋自欺愼其獨十二字揭諸壁上 以爲日夕觀省之資 尤足以見其剛健篤實之工也 及壬辰兵作 始得賜環而歸 展謁行朝 仍陳戰守機宜 莫非救時要切之務 上諒其忠誠 深加歎賞 自是凡所論議 益復剴切懇到 正大光明 至以任大臣以整朝綱 委體察以飭軍務 絶和議以明大義 勤學問以輔聖德等語 惓惓爲上言之 至他營救善類 指斥奸黨之說 瀝盡肝肺 無所顧避 雖遭擯斥 不少怨悔 若先生者眞大易所稱陽明剛正之德 而孔子所謂剛毅近仁者矣 惜其平生所論著 太半散失於鄕莊回祿之災 獨講義疏箚賦詠筆札數十百篇及續綱目一帙 獲免煨燼之禍 亦足以發明先生秉道義陳堯舜匡君正國之規 與夫誅奸諛發潛德史外傳心之法 而至於著之翰墨 播諸聲詩者 亦皆淸夷間曠 懇惻條暢 絶無靡曼巧麗穠華浮艶之態 眞所謂中和之發 而有德者之言也 蓋其所稟於天者 一出於淸純正直之氣 故發於事業文章者 如是其俊偉光明 朱子所謂文章之作 豈其勉强慕效而爲之 蓋必有其本云者 於此益可見其實然矣 先生旣沒 寒岡鄭文穆公旣狀其行 旅軒張文康公又爲之敍其後 所以發揮引重 固已無復餘蘊矣 先生之四世孫世選 復使玄逸序其篇端 玄逸謝不敢 而其請愈力 不得辭也 因以其平日所感於心者 書于卷末 使後之覽者 得有所考云 上之二十九年昭陽協洽四月丙午 後學載寧李玄逸 敍
성인이 역(易)을 지음에 유명(幽明)의 연고에 통하고 선악의 분변을 밝혀, 양으로 군자를 삼아 끌어 당기고 도와서 보호하고 음으로 소인을 삼아 밀어내고 물리쳐 축출하였다. 대개 양의 덕은 강인한 까닭에 사람에 품부되어 덕이 된 것이 모두 정대(正大) 광명(光名)하고, 음의 덕은 유약한 까닭에 그 기운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유암(幽暗) 간특(奸慝)한 이가 많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께서 “강의에 인에 가깝다”라고 하시고, “참으로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탄식하신 까닭인 것이다. 아아! 우리 문정공(文貞公) 동강 김선생같은 분은 참으로 『주역』에서 이른바 ‘양강한 군자의 덕’이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내가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라 하겠다. 선생은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 수학하여 이미 입신행기와 출처진퇴의 의리를 알았으며, 이윽고 다시 문순공(文純公) 퇴계 이황 선생을 뵙고 성현이 서로 전한 도통의 진결을 듣고, 지경과 궁리가 도에 들어가는 요체임을 알았다. 이에 침잠반복하여 의리를 더욱 정미롭게 연구하고, 정제 엄숙하여 자신을 더욱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덕업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져 실제 벼슬에 종사하게 되어서는 그 충성 인애, 강직 엄정함이 모두 바른 도의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벼슬에 처음 올랐을 때, 수립한 조신(操身)이 구차하지 않았던지라,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선생이 편지로 경하하면서 공을 고니에 자신을 벌레에 비겨 탄식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남상(南床)으로 있을 때, 소명을 받아 주상과 면대하게 되자 먼저『서경·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오직 전일해야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을 아뢰고 이어 ‘예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의로서 일을 다스린다’는 대목에 말이 미쳤다. 처음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 문득 논설이 이에 미쳐 조짐이 되엇으니 임금을 요순이 되게 하고 삼대의 선치를 회복할 뜻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하겠다. 홍문관과 경연관의 직책에 있을 때에는 무릇 글에 따라 부연 설명하여 경전의 뜻을 천명 발휘한 것이 모두 선을 펴고 사특함을 막아, 임금을 도에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의리가 아님이 없었다. 그리고 간쟁과 풍헌의 직책에 있을 때에는 무릇 마음에 무릇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주상의 위엄을 범하면서까지 지성으로 정녕히 말한 것이 기장을 떨치고 가다음어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계하는 논의가 아님이 없었다.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서는 오로지 학교제도를 닦아 밝히며 인재를 육성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구휼하고 임금의 급무를 삼았다. 그리고 지방관이 되었을 적에는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임금의 덕화를 이어 교화를 선양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한편 임금의 인견과 자문에 이르러서는 일에 따라 규계를 바친 것이 경전을 인용하고 예서에 근거하여 임금의 미덕을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는 말과 공평정대하게 조정을 진정시키는 뜻이 아님이 없었다. 지금 그 주의(奏議)의 글들을 보면 진실로 동중서(董仲舒)와 육지(陸贄)의 규모에 손색이 없다 하겠으며 경연에서의 진언에는 완연히 정주(정자, 주자)와 회퇴(회재, 퇴계)가 임금을 바로잡던 유범이 있었으니, 아아! 성대하도다. 선조 초년, 주상의 총애가 바야흐로 깊어 누차 가상히 여겨 장려해 주시는 은전을 입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찍이 경연에서 정철(鄭澈)의 간악한 정상을 곧바로 물리쳤고 이이(李珥)이 편파적으로 자기 편을 옹호한 과실을 진달했다. 그러다가 시론(時論)에 크게 밀려난 나머지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쌓아 둔 경륜을 다 펴지 못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선생이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한 정성은 시종 한결같아, 언제나 간절하였다. 그러나 평소 성품이 고요하고 담박했기에 벼슬하는 심정은 잠시 몸을 부친 곳인 양하였다. 그리하여 한 계자(階資) 한 등급이라도 상례를 띄어넘어 승진하면 반드시 소장을 올려 사양하고, 한 마디 말 한 가지 일이라도 평소의 양심에 조금 어긋나면 문득 사지갛고 물러났으니, 강의 과단하여 털끝만큼도 미련을 두는 사심이 없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기축(己丑, 1589)년, 회령에서 귀양갔던 재앙은 실로 흉악 사특한 무리들이 모함 날조하여 생긴 것이다. 해괴한 기미가 눈에 보이고 유언비어가 시끄럽게 떠돌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 어쩔 줄 몰랐지만, 선생은 태연히 개의치 않고 조금도 말과 얼굴에 두려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생사의 기로에서 태연히 담소하고 쇠바퀴가 묵은 위에 빙빙 돌아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은미한 데서 미리 막고’, ‘홀로 삼가는 ’공부를 항상 끊임없이 계속하여 비록 다급하고 위태한 상황에서도 일찍이 하루도 태만히 보낸 적이 없었다. 먼 변방에 유배가서 곤궁하게 생활할 적에도 반드시 퇴계 선생이 쓰신 ‘사무사(思無邪)’, ‘무불경(毋不敬)’, ‘무자기(毋自欺)’, ‘신기독(愼其獨)’ 열두 글자를 벽에 걸어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그 강건독실한 공부를 보기에 더욱 충분할 것이다. 왜란이 일어난 임진년에 비로소 사면을 받아 배소(配所)에서 풀려나자 행조(行朝)로 가서 주상을 배알하였다. 이어서 전쟁에서의 기무를 진달하니, 시국을 건지는 긴요하고 절실한 내용이 아님이 없었기에 주상께서 충성을 알고 깊히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무릇 논의한 바들이 더욱 절실 간절하고 광명정대하여, ‘대신에게 위임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을 것’, ‘체찰사를 보내어 군무를 신칙할 것’, ‘화의를 끊어 대의를 밝힐 것’, ‘학문에 힘써 성덕을 도울 것’ 등의 말을 지성껏 주상께 아뢰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밖에 선류(善類)를 구하고 간당(奸黨)을 물리친 논설에 이르러서는, 폐부를 쏟아 내서 이른바 ‘양명(陽明) 강정(剛正)한 덕’을 지녔고 공자께서 이른바 ‘강의가 이니에 가깝다’는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평소의 논저가 고향 집의 화재로 태반이 산실되고 만 것이 애석하긴 하나, 그나마 경연강의(經筵講義), 소차(疏箚), 시부(詩賦), 간찰(簡札) 등 수십백 편 및 『속강목』한 질이 소실의 화를 면했다. 이러한 저작들이 선생의 도의를 지키고 요순의 도를 개진하여 임금과 나라를 바로잡으려 했던 규모와 간사한 무리를 베고 숨겨진 덕을 드러내며 사책(史冊) 밖에 마음을 전했던 법도를 드러내 밝히기에 또한 충분하다 하겠다. 한편 한묵(翰墨)에 적어 두고 시편에 나타낸 것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청이(淸夷) 한광(閒曠)하고 간측(懇惻) 조창(條暢)하여, 화미(華靡) 공교(工巧)하고 부화(浮華) 농염(濃艶)한 자태가 전혀 없으니, 참으로 이른바 ‘중화(中和)의 발현’이고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 하겠다. 대개 선생의 천품은 한결같이 청순정직한 기운에서 나왔던 까닭에 사업과 문장에 발현된 것이 이렇듯 우뚝히 빛나는 것이니, 주자께서 이른바 ‘문장을 짓는 일이 어지 억지로 힘쓰고 남을 모방해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는 말씀이 참으로 진실인 줄 여기서 더욱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문목공 정구 선생이 행장을 짓고 문강공 장현광 선생이 다시 행장의 발문을 지었으니, 발휘하여 추중한 바가 이미 유감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선생의 4세손 세선(世選)이 다시 현일(玄逸)더러 서문을 써주길 청하였다. 이에 현일이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청이 간곡하여 사양할 수 없기에 평소 마음에 느끼고 있던 바를 책 끝에 써서 후세에 보는 이들이 상고할 수 있도록 한다. 숙종(肅宗) 29년(1703) 4월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은 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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