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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鄒川集 -

 

 跋文

嗚乎 此鄒川孫公先生遺集也 公師事退陶先生 而又嘗宰宣城 然則公之於退陶 猶儲行之之於考亭也 然儲宰之守建寧也 則不幸而値慶元黨籍之時 公之宰宣城也 則幸而値明宣崇儒重道之際 故其留心學校則一也 而儲宰則以是而挺聖塑腰膂之厄 公則以是而助賢師鼓鑄之化 其贈遺師門則一也 而儲宰之一闋壽詞 適足以資羣少彈駁之章 公之一封松菌 至今猶可以想見大賢與許之微意 則其幸不幸 又何如也 要之公學道愛人之效 不但宣城爲然 而其可紀之蹟 最著於宣城者 無他 宣是退陶夫子之尤溪婺源 而公守其土 首尾六年 服事師門 最久且勤故也 今是集所載 無非隴雲天淵之遺芬影子 而公之德業履治 因之而益著 太史氏所謂得夫子而名益彰者 不其信乎哉 噫 驪江 李鍾祥謹識


오호라 이것은 추천 선생 손영제선생의 문집이다. 공은 퇴계선생을 사사하였고 또 일찍이 예안현의 수령을 지냈다. 그렇다면 공이 퇴계선생과의 관계는 저행이 주자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러나 저행이 건녕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불행하여 경원 당적의 때를 만났고, 공이 예안의 수령이 되었을 때는 명종과 선조가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던 때를 만났다. 그래서 학교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한가지이다. 저행이 수령이었을 때는 이것 때문에 공자의 동상이 부러지는 액운을 만났고, 공은 이것 때문에 어진 스승이 고무시키고 교화시키는 가르침을 도울 수 있었다. 스승의 문하에 보탬이 된 것은 한 가지이다. 저행의 한 수의 壽詞는 마침 여러 소인배들이 탄핵하는 글에 도움이 주기에 충분했고, 공의 한 무더기 송균은 오늘날까지 대현이 서로 허여한 은미한 뜻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행복하고 불행함이 또 어떠하겠는가? 공이 도를 배우고 사람을 사랑한 효과를 살펴보면 예안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안에서 기록할 만한 공적이 가장 현저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안이 바로 퇴계선생의 우계요 여원이기 때문이었다. 공이 그 곳을 지킨 것이 6년인데, 스승을 마음으로 따르고 섬긴 것이 가장 오래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집에 실려 있는 것이 농운정사와 천연대에 남은 향기 아닌 것이 없고, 공의 덕업과 치적이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 드러났다. 태사씨가 말한 ‘공자님을 얻어서 이름이 더욱 빛났다’라는 것이니, 믿지 않겠는가!
여강 이종상은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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